연성/쿠로바스
[단편/패러디/쿠로바스/화흑] 일상의 행복
멍선생Q
2015. 10. 11. 23:59
일상의 행복
카가미는 요새 매 주말마다 도서관에 발도장을 찍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사서로 일하고 있는 쿠로코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의 직장을 한 번 둘러보고 말 셈이었는데 어떻게 하다보니 주말마다 방문하게 되었다. 쿠로코는 웬일이냐고 의아함을 표하면서도 마침 잘 됐다며 언제부터인가 그에게 책을 한 권씩 추천해주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그 큰 몸집을 도서관 자리에 구겨넣고 그 책을 다 볼 때까지 꼼짝도 못하고 붙잡혀 있어야 했다.
그래도 고등학교 때 카가미의 공부를 봐 준 적이 있는 쿠로코는 그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고, 그렇게 어려운 책을 권하지는 않았다. 카가미의 수준에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추천해주는지라 그도 어느새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되었다. 책은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언제부턴가 사르르 녹아 없어져버린 것이다.
충분한 휴식도 선수의 미덕 중 하나라는 말에 주말에 쉬기 시작한 카가미는 휴식의 변질을 겪어버리고 말았다. 처음 쉬게 되었을 때는 어색함에 쿠로코나 따라 가자, 라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목적이 바뀌어버렸다. 읽다보니 이제는 책을 읽는 속도가 꽤 빨라진 카가미는, 벌써 해치운 책 한권을 책상 한 구석에 밀어놓고 생각에 빠졌다. 그러니까 분명 시작은 갑작스레 생겨버린 빈 시간을 때우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
"정말 괜찮겠습니까? 너 책 싫어하잖아요."
"날 뭘로 보는 거야! 책을 싫어하는 거지 책이 있는 장소까지 싫어하는 건 아니거든. 내가 책을 읽는 너는 좋아하는 것처럼."
"말은 잘합니다."
근무처인 도서관으로 향하면서도 쿠로코는 의심과 걱정의 눈길을 지우지 못했다.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상관없다고 말하긴 했는데 이 사람이 도서관에 가만히 있을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기고 만 것이다. 카가미는 격한 반발을 했지만 끝내 쿠로코의 신뢰를 얻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도서관에 도착했다. 일본에서 쉽사리 볼 수 없는 훤칠한 키의 등장에 슬금슬금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지만 두 사람 다 신경 쓰지 않았다. 쿠로코는 워낙에 덤덤한 성격이고 카가미는 원래 둔한 성격인 데다가 시선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저는 종합자료실에서 근무합니다. 같이 갈래요?"
"그럼 너 따라 가야지 내가 여기서 어디 있겠냐?"
"그건 그렇군요. 조용히 있어야 합니다."
"내가 애냐! 도서관에서 떠들게!"
"가만히 못있을 것 같으니까 그렇죠. 답답하면 산책이나 하고 오세요. 뒤쪽이 야트막한 산입니다."
"아, 그건 좋네."
쿠로코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카가미의 의사를 물었다. 묻고 자시고 카가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얼마 없었다. 그 중에서도 그가 선택할 만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나 몇 시간 동안 가만히 있을 자신은 없었는지 도서관 뒤쪽이 야트막한 산이라는 것에는 표정이 밝아졌다.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쿠로코는 5층을 눌렀다.
아직 개방하지 않은 시간대의 도서관은 사람들의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아 매우 적막했다. 쿠로코는 중간중간 만나는 직원들에게 카가미를 친구라고 소개하며 종합자료실에 도달했다. 불을 켜니 압도당할 만큼 많은 책장이 빼곡하게 들어서있다. 쿠로코는 능숙하게 데스크에 짐을 풀었다.
"아무데나 앉아있으면 됩니다. 책이라도 줄까요?"
"아서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쿠로코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더 이상 그에게 책을 권하지 않았다. 앉아있으란 소리는 들었지만 솔직히 반쯤은 그의 직장을 구경하고 싶어서 온 것이었다. 카가미는 쿠로코가 자리 잡고 앉은 데스크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자료들이 뒤에 모여있다. 컴퓨터를 켠 쿠로코는 보기만 해도 어지러운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화면을 아무리 봐도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금방 컴퓨터 화면에 흥미를 잃은 카가미는 자료실 전체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꽤 높은 곳까지 책장이 자리 잡고 있어 카가미의 눈높이에도 책들이 보였다. 보통 사람들은 쉽사리 꺼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발판으로 쓰는 2단의 사다리 계단이 가장자리에 놓여 있었다. 책장의 열과 열 사이를 한 번씩 지나다니는 것만으로도 꽤 시간이 걸렸다. 그새 개장시간이 다가왔고 조금씩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말 9시부터 사람이 찾아오는 것에 카가미는 신기함을 감추지 못했다.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어디 앉아 있으세요."
카가미가 자꾸 어슬렁거리자 결국 쿠로코가 한 마디 건넸다. 주말은 돌아가면서 근무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업무에 부담이 없었다. 필수가 아닌 선택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아이를 데리고 오는 직원도 있었다. 그래서 자신도 부담없이 그를 데리고 왔지만 그래도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카가미는 알겠다면서 엉거주춤 데스크의 빈 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는 자리에 앉기에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쿠로코는 북트럭에 쌓인 책들을 잠시 분류하더니 몇 권을 들고 책장 사이로 사라졌다. 눈으로 쿠로코의 모습을 쫓던 카가미는 이내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흥미를 잃었다. 무료하게 이미 본 곳을 또 보고 관찰하던 카가미는 그가 다시 시야에 들어오자 또 그를 쫓았다. 이번에는 시야에 들어오는 곳이다. 잠시 책장을 더듬던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책장에 꽂는다. 눈높이에 있던 책은 그렇게 서서 꽂더니 옆으로 이동한 그의 몸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간다. 허리를 숙이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그가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는다.
'아, 반칙인데, 저건 귀엽잖아.'
고등학교 때도 그는 종종 몸을 쪼그리고 앉았다. 다리 사이에 손을 짚고 앉아있기도 해서 늘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 점을 입밖에 냈더니 남자한테 귀엽다는 칭찬이 아니라며 혼났지만 말이다. 그래도 어쩌냐, 귀여운데.
의외의 수확을 얻은 카가미는 턱까지 괴고 쿠로코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 있는 책장에 책을 꽂기 위해 까치발을 하는 모습까지 귀여워 죽겠다. 계속 발돋움을 하고 있는 것이 힘이 부쳤는지 잠시 쉬었다가 심기일전해서 다시 팔을 뻗는다. 아, 어쩌지. 웃음이 새나갈 것만 같았다.
"저기 책 대출이요."
"아, 잠시만요. 어-이. 쿠로코-"
카가미가 데스크에 앉아있으니 직원인 줄 알았나보다. 정작 까막눈인 카가미는 얼른 쿠로코에게 SOS를 요청했다. 도서관임을 감안해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지만 쿠로코는 귀신같이 고개를 돌렸다. 곧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는지 부리나케 자리로 돌아온다. 카가미를 따라 시선을 돌렸던 이용객은 대체 누굴 부르나 싶어 계속 그쪽을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으나, 데스크로 귀환한 쿠로코가 그에게 손을 뻗으며 책을 가져갔다.
"대출 되셨습니다."
이용객은 쿠로코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잠시 화들짝 놀랐다가 웃으며 자리를 떴다. 카가미는 여전히 존재감이 없는 건 알아줘야 한다면서 키득거리다가 쿠로코에게 한 대 얻어맞았다. 그 이후로 카가미는 쿠로코를 구경하는 쏠쏠한 재미에 빠져들었다.
책정리에 전념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특히 낮은 데에 책을 꽂겠다고 쭈그리고 앉았을 때랑, 높은 곳에 책을 꽂으려고 까치발을 드는 게 제일 귀여웠다. 둘 중에서도 우열을 고르라면 높은 곳의 책을 정리하려고 낑낑대는 모습이었다.
무슨 고집인지 사다리 위에 올라가 하면 편할 것을 꿋꿋하게 까치발을 유지한다. 손이 안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계속 까치발을 하고 있는 게 힘들 텐데. 게다가 팔에는 책을 한가득 끌어안고 저러고 있으니 조금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결국 카가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쿠로코에게 접근했다. 일단 당장이라도 그의 팔에서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책부터 받아 들었다.
"뭘 그렇게 미련하게 낑낑거리고 있어?"
"아, 카가미군."
"어떻게 하면 돼?"
"깊게 꽂혀 있는 걸 앞으로 빼면 됩니다. 옆에 책장처럼요."
쿠로코는 거리낌없이 카가미를 부려먹었다. 카가미는 쿠로코의 말대로 옆의 책장을 슬쩍 보더니 책들을 다 바깥쪽 끝에 맞춰서 배열했다.
"얇은 것들은 깊게 꽂혀있으면 안보일 수도 있거든요. 끝쪽에 맞춰서 꽂는 것이 정석입니다."
쿠로코는 친절하게도 왜 그렇게 꽂는지 이유도 알려주었다. 카가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책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쿠로코가 다시 책을 받아들려고 했지만 카가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겁게 왜 이렇게 많이 들고 다녀? 앞장 서."
카가미의 말에 잠시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고 있던 쿠로코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퉁명하게 말하면서도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비추는 그가 기특했기 때문이다. 고맙고 음, 사랑스럽기도 하고. 쿠로코는 책등에 붙어있는 번호를 봐야 앞장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카가미는 책등이 보이게 책을 고쳐 들었고, 쿠로코가 앞장을 섰다. 카가미가 그 뒤를 따라 책을 운반해주었고 높이 있는 책은 그가 대신 꽂아주기도 했다.
물론 전부 그러지는 않았다. 쿠로코가 카가미를 그렇게 많이 시킬 정도로 일에 대한 고집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쿠로코가 높은 곳에 책을 꽂겠다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찬스를 놓칠 카가미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쿠로코는 일을 조금이나마 수월하게 하고, 카가미는 눈호강을 하고 서로에게 일석이조였다. 쿠로코는 키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무거운 거 대신 들어줄 짐꾼이 생긴 건 편하다는 말을 숨기지 않았다. 카가미는 듬직한 애인 이럴 때 써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웃어 넘겼고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순조롭게 업무를 이어나갔다. 결국 카가미가 구석쟁이의 책장에서 쭈그리고 앉았다가 일어나는 쿠로코의 입술에 가볍에 입맞춤을 했다는 건 두 사람만의 비밀이다. 당장 쿠로코가 신성한 일터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발길질을 해댔지만 붉어진 얼굴을 숨길 수는 없었다. 그게 또 귀엽다고 볼에 입을 맞췄다가 홍당무가 된 쿠로코를 발견한 카가미는 저도 모르게 유쾌하게 웃어버렸다. 도서관 특유의 침묵에 기가 죽어 반사적으로 입을 막긴 했지만 말이다.
***
음, 그래 분명 처음 취지는 그거였어. 그냥 쿠로코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다음 날에도, 그 다음 주말에도 내내 그를 따라 도서관에 오기 시작했지. 그러다가 이건 자기가 돈 받고 하는 일이니까 자기가 하게 내버려 두라면서 쿠로코가 자립을 선언했고, 심심해 죽어가는 자신에게 그가 책을 권했다.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반쯤 억지로 받아들게 된 것이 또 꽤 재밌어서 이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래도 가끔은 그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편리함을 알아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카가미도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보단 몸도 움직이고 그도 도울 수 있는 편이 좋았다.
도서관에 다닌지 꽤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며 카가미는 두 번째 책을 펼쳐들었다. 그리고 그날 퇴근길, 왠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쿠로코 때문에 카가미는 살살 눈치를 살폈다.
"무슨 일 있었어?"
"...카가미군 이제부터 도서관 안 오면 안됩니까?"
"왜? 책 읽는다며 좋아할 때는 언제고."
결국 당당하게 물어본 직선적인 카가미는 망설이다가 되돌아온 대답에 의아함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카가미가 권해서 다니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쿠로코가 먼저 그에게 도서관을 가길 권할 정도였다. 내일도 도서관 같이 갈 거죠? 라며 카가미가 책을 읽는 것에 반색을 표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시선이..."
"시선? 뭘 새삼스레."
중얼거리는 것처럼 나오는 말도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이 키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시선을 받는 건 익숙해졌다. 새삼스레 거론할 사항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시선 말고, 여자들의 시선 말입니다. 네가 정기적으로 다니기 시작한 후로 너만 보러 오는 여자들이 생겼단 말입니다."
여전히 관찰력이 뛰어난 쿠로코 아니랄까봐. 본인도 모르는 시선을 언제 그렇게 눈치 챘는지 모르겠다. 카가미는 유쾌하게 웃음을 흘렸고 쿠로코는 웃을 거리가 아니라면서 화를 냈다.
"내 남자 외간 여자랑 공유할 생각 없습니다."
기꺼운 질투였다. 애인의 입장에서 사랑스럽기 그지 없고 뿌듯하기 그지 없는 발언이었다. 카가미는 길거리라 그를 당장 끌어안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며 집에 들어간 후를 기약했다.
"나는 쿠로코 일하는 거 보는 게 좋은데."
"제가 일하는 거요?"
"응. 그리고 일할 때까지 너랑 같이 있는 게 좋고."
"...그래도 저는 싫습니다."
쿠로코라고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이 싫을 리가 없었다. 일할 때는 필연적으로 헤어져야 했었는데, 주말이라도 같이 있을 수 있게 되니 기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다. 안 그래도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사람인데 말이다.
"으음, 그럼 너 근무 안 하는 주말에는 빌려와서 집에서 책 읽자. 그럼 되지? 너 근무하는 주말까지 포기할 생각은 없는데.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으니까."
"그 정도라면 양보하겠습니다."
카가미가 환하게 웃으며 한 제안에 쿠로코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쿠로코가 매 주말마다 근무하는 것이 아님에도 도서관을 찾은 건 책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이라면 집에서도 읽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서 읽는 것이 편하니까 그랬던 거지, 대출하는 수고로움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크게 불편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드디어 집에 도착한 카가미는 쿠로코를 단숨에 끌어안았다. 숨이 막히도록 품어주는 카가미의 체온을 느끼며 쿠로코도 그를 마주 안았다. 거의 동시에 서로의 품에서 빠져나온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입을 맞추고는 베시시 웃었다.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이었다. 이 사소한 행복이 일상이 된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이제는 이 사소한 행복을 사수하는 것이 일생의 소원이 되어버렸다. 동시에 자신한다. 그 소원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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